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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길만의 일상생활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안길만의 자기 소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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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길만 예비후보자의 “자기소개서”를 공개합니다.
저 안길만은 전라북도 정읍시 소성면 봉양리 185번지 안당마을에서 부친 순흥(順興) 안(安) 氏 동(東) 자 현(顯) 자, 모친 전주(全州)이(李) 氏 복(福) 자 자(子) 자의 3남 2녀 중 넷째로 1966년 11월 15일 태어났습니다. 1997년에 배우자 이수진(1972년생) 씨와 결혼하여 1남 3녀의 가장으로 자영업을 하고 있으며, 아내는 정읍 울림야학교 교장선생님으로 30여년째 봉사활동을 하며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정읍시민입니다.
안길만이 태어난 1966년은 어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가정 속에서 유년 생활을 보냈습니다. 저는 학교에 가고 싶어서, 형들을 몰래 따라가 가끔 학교를 구경하곤 했습니다.
1973년 3월에 입암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즐거운 학교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에 새로오신 담임 선생님 덕분에 배구부 선수로 선발되어 학교 생활의 모든 것이 재미있고 더욱 즐거워졌습니다. 지금도 선생님을 자주 뵙고, 인연이 이어지고 있으며 항상 좋은 영향을 주시는 감사한 분이십니다. (현재는 학교 정년을 마친 뒤 정읍 울림야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1979년 2월 즐거운 초등학교 추억을 마치고 입암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새로운 중학교 생활도 마냥 즐거웠습니다.
1학년 때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는 커다란 심적 충격으로 다가왔었습니다. 그제야 대통령은 국민투표로 뽑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그러던 중, 1학년 말 2학년 반 배정을 우열반으로 만들어 수업을 한다는 담임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교감선생님과 교장선생님에게 항의성(?) 면담을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후, 무기력한 중학교 2학년 학교생활이 시작되었고, 1980년 5.18광주 민주화운동 이야기와 혼란스러운 뉴스 속에서 재미없는 생활이었습니다.
무기력에서 탈출할 기회를 찾던 중 추석 때 큰형님이 포항에서 서울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자취방을 준비해야 한다는 소식 듣고, 이때다 싶어 나도 따라가야겠다는 욕심과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크게 된다며 부모님을 설득하였고,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입암중학교 3학년, 1981년 3월 2일자로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신림중학교로의 전학을 허락받았고, 2월 27일 촌놈을 벗어나려는 큰 꿈을 가지고 입암천원역출발 노량진역에 도착하는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습니다.
당시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해서 작은 반지하 단칸방(관악구 봉천 4동 일명 달동네) 하나 얻어 형님과 서울 자취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울 신림중학교 3학년과 서울 남강고등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경기대학교 응용 통계학과에 입학하고, 87년 6월 항쟁 후 군 복무를 위해 고향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1988년 4월부터 정읍시 방위병으로 과교동 중대에서 군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고향 정읍에서의 생활은 친구들과 다양한 정읍 분들의 만남은 참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방위생활 마침표를 찍는 1989년 9월 28일 제대 당일 아침 연병장에서 국군 보안대는 저를 체포했습니다. 국군보안대는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일명 ‘황토현 사건’을 만들어) 저를 비롯한 4명을 구속하고, 수십 명을 수배 조사하였습니다.
당시 동지들과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시민도서문고 “책사랑”과 정읍우도풍물연구회 “황토현”을 결성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나아가 정읍문화센터”황토현”으로 발전시켜가던 중이었으며, 노태우정권이 임수경. 문익환 목사님 방북을 계기로 통일 열기를 잠재우고자 전국적으로 공안사건들을 조작하면서 공안정국인 공포정치시대였다. 그중에 국군보안대의 실적 쌓기 희생양으로 정읍문화센터 “황토현”을 온갖 허위 조작과 폭력으로 저희의 문화활동을 종북활동으로 둔갑시켰던 것입니다. 정읍문화센터 ‘황토현’의 문화활동을 반국가단체로 조작하여 북한을 찬양하는 단체로 날조했던 것입니다. 35사단 1심 군 재판부 군검찰은 안길만에게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징역5년과 자격정지 5년을 선고하였다. 2심 육군본부 재판부에서 군검찰은 징역10년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하였고, 다른 4명의 동지들에게도 비슷한 형량으로 육군교도소와 대전교도소 생활을 견뎌내야 했고, 또 다른 동지들은 수년동안 방랑 아닌 수배생활을 해야만 하는 고초를 견뎌야만 했습니다.
결국 김영삼정권이 들어선 뒤, 8개월 감형을 받았으나 1989년 9월부터 시작된 감옥생활은 1992년 2월에야 대전교도소 문이 열렸습니다. 긴 감옥생활은 나의 인생을 새롭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출소 후, 고향 정착으로 마음을 먹고, 농민후계자 준비와 사회개혁 운동을 위해 청년운동과 갑오동학 계승사업회에서 갑오동학농민혁명 100주년 사업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나아갔습니다.
뭘 하고 살 것인지 숙고하던중 IT분야인 유한회사 하나 통신을 설립하였습니다.
지역 내 정보화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사회봉사활동을 인정받아 정읍 시장, 정읍 경찰서장, 전라북도지사 등으로부터 상을 받는 영광도 있었고, 2003년 6월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으나 젊음의 상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업을 시작하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지역 내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와 정읍농민회,정읍 경실련, 전북서남권상공회의소, 정읍 농촌관광연구회, 국제와이즈멘, 국제로터리클럽, 국제라이온스클럽 등 각종 봉사클럽을 통해 “살기 좋은 정읍 만들기”와 입암중학교 운영위원장, 입암면지편찬위원회 사무국장, 연지 체육회장, 정읍문화원 이사 등으로 지역주민과 함께 지역 문화 창달과 살기 좋은 도시 만들기에 작은 힘이나마 노력해 왔습니다.
2006년 지방자치시대를 맞이하여 살기 좋은 정읍 만들기에 앞장서고, 좀 더 적극적으로 지역사회에 봉사하고자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정읍시 다 선거구에 출마하여 3등,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3등으로 의회 진출이 좌절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세 번째 도전으로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인 2014년 6월 4일 선거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정읍시의회의원에 당선되어 시정을 살펴보고,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제7대 의회에서 전반기 자치행정위원회에서 정읍시 전체 살림살이를 살펴보면서 정읍시 부채 절감을 위해 행정에 강력히 요구하여 결국 지방채가 없는 정읍시가 되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었습니다. 수제천지원조례를 발의하여 현재의 정읍 수제천으로 발전하는데 초석을 다진 것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하반기에는 농업농촌지역의 특색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경제건설위원회로 옮겼습니다. 영광스럽게도 동료 의원님들의 성원으로 경제건설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정읍시민들에게 좀 더 잘 사는 정읍으로 만드는데 노력했으나, 2018년 당내 경선 실패로 좌절되었습니다.
하지만, 4년의 시간은 저에게 숙고의 시간과 좀 더 지역에 대한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입암면지편찬 작업으로 <입암의 얼 >발간작업을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한국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 경영학과 석사과정 2학년에 재학하며 지방재정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2022년 6월 1일에 실시하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다시 한번 꼭 의회에 진출하여 시민에 대한 봉사와 시민의 삶을 잘 살펴서 ‘정읍을 정읍답게’ 만들고, 나의 소중한 목표인 ‘사람의 가치가 존중받는 정읍’으로 만들어가는데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제는 바꿉시다!
안길만으로
2022년 4월 6일
후보자 안 길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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